영화 ‘기생충’, 낙수효과 비틀기 그리고 칸의 선택
영화 ‘기생충’, 낙수효과 비틀기 그리고 칸의 선택
  • 한림미디어랩 The H
  • 승인 2019.06.19 08: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황석(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
이황석(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

프랑스 칸에서 낭보가 전해졌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칸영화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비평가가 아닌 팬의 입장에서 영화는 좋았지만, 감독의 최고작은 아니었다. 그동안 완성도 높은 장편영화를 꾸준히 발표한 감독이 받아야 할 상을 결국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했으나 평단의 호평을 받았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 한국 영화사의 걸작으로 꼽히는 ‘살인의 추억’, 천만 관객 영화로 대중적으로 성공한 ‘괴물’, 단연코 봉준호 감독의 최고작인 ‘마더’, 아쉬운 점이 많지만 우화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직면한 현시대를 성공적으로 풍자한 ‘설국열차’, 넷플릭스 개봉으로 실험적인 배급을 시도했으며 영화 연출의 스타일이 두드러지는 ‘옥자’에 이르기까지 봉준호의 작품은 오차 범위(?) 안에서 망작 없이 일정 수준 이상의 뛰어난 연출력을 보여 왔다. 따라서 ‘기생충’만을 가지고 칸의 심사위원들이 감독에게 대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다기보다는 그의 장편 영화들을 패키지로 묶어 수상작으로 선정했고, ‘기생충’은 일종의 ‘썸네일’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특히 특정 이미지의 반복을 통해 점진적인 방식으로 노출되는 의미의 향연은 이루 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다. 상황을 충돌시키는 대구(對句)의 방식은 영화 대부에서 보여준 코폴라 감독의 연출력에 버금갔다. 계단의 미장센은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의 수직 트랙을 이동하며 찍은 장면과 ‘하녀’로 한국영화사에 획을 그은 김기영 감독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였다. 장르의 변화무쌍함과 서스펜스는 봉준호라는 이름에 걸맞았다. 한마디로 동원 가능한 영화적 표현의 총망라였다. 그런데도 산만하지 않으며 절대로 초점을 잃는 법이 없었다. 급변한 상황묘사에 포커스를 맞춘 한 연출은 정교하게 복선과 암시 개연성의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봉테일이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디테일에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했다. 

또한 스타워즈가 아닌 ‘을들의 전쟁’을 벌이는 한국사회에 대한 묘사가 탁월했다. 떡고물처럼 떨어져 피라미드의 아랫부분을 풍족하게 한다던 소위 ‘낙수효과’를 부르짖던 신자유주의의 주장을 비틀어 해체시킨다. 낙수효과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홍수효과가 돼 대다수 우리가 살고 있는 낮은 곳이 침수되고 ‘게토(유대인 강제 격리 지역)’화 된다. 피폐화된 채 흩어져 ‘우리’라는 등장인물들은 체육관으로 혹은 지하 깊숙한 곳으로 고립돼 간다. 이제 삶과 일상은 헤어 나올 수 없는 아수라장임을 드러낸다. 마침내 스스로를 유폐시킴으로써 살아도 살아있지 않은 좀비화 된 존재임에도 희망을 놓지 못하고 모스부호를 어디엔가 끊임없이 날리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영화는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인물들이 직면해가는 상황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내면의 심리변화에 대한 묘사엔 아쉬움이 있다. 봉테일이 ‘마더’에서 보여준 기막힌 심리묘사는 찾기 어려웠다. 인물들이 급하다 싶게 심경의 변화를 보인다. 말하자면 박제화된 캐릭터만이 살아있다. 그럼에도 독해의 차원에서 영화에 접속하면 한국사회에서 내면과 직면해 자신을 대면하는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에서의 이생은 가진 자들이건 못 가진 자들이건 모두 스테레오 타입으로 이미 박제돼 쇼윈도에 전시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급반전하는 장르의 변화에도 잘 어울린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어느 누군가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솔직히 감독은 ‘저자의 입장’에 충실해, 작품을 만들고 나선 죽음과도 같은 침묵의 미덕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봉테일의 전작인 ‘설국열차’의 경우 두 가지 면에서 좀 실망스러웠다. 첫 번째는 이전 영화와는 달리 영화 속 미장센에 포진된 상징들이 매우 공격적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일종의 메타포를 강요당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불편했다. 봉테일은 숨어있는 디테일을 구사하는 감독에게 헌정된 별명인데, 그에 부합되는 작품은 아니었다. 숨어있던 디테일은 욕망처럼 영화 전면으로 스멀스멀 기어 나와 바퀴벌레처럼 관객을 기습했다. 그럼에도 좋았다. 설국열차를 보면서 앙리 르페브르의 사유가 읽혔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주류사회가 ‘공간과 시간’을 어떤 방식으로 체제운영의 매커니즘으로 활용하려 했는지, 그리고 그와 같은 체제하에 피지배층의 일상은 어떻게 구속당했는지에 대한 이해가 영화의 모티브에 깔려 있었다. 지적 유희를 갈구하는 필자의 허위의식을 채워줘 고맙기까지 했다. 

문제는 그다음에 있었다. ‘설국열차’가 국내에 개봉되면서 각종 매체를 통해 영화를 홍보하는 모습이 무슨 홍수라도 난 것 같았다. 마치 천만을 채우고야 말겠다는 기세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겸손인 양 900만 관객으로 마무리한 것은 미덕처럼 보였다. 화룡점정처럼 최고조로 불편했던 것은 극장 개봉 중인 영화를 감독이 각종 매체에 나와 자세한 각주를 달아주는 모습이었다. 실망이 저 바닥을 치다 못해 봉준호 감독으로부터 필자 스스로를 유폐시켰다. 대중영화 감독이 홍보를 위해 인터뷰 정도는 능히 할 수 있다. 그런데 감독 스스로 상영 중인 자신의 영화에 각주를 달다니 헐!, 감독을 지하에 가두어둘 수는 없기에 필자의 팬심을 깊은 지하에 묻어버렸다. 그런데 팬심이란 게 어디 그런가! 굳이 넷플릭스에 접속해 감독의 다음 작품 ‘옥자’를 보고 나선 다시 팬심을 돈독히 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사실 칸의 선택은 자고로 유럽 중심주의 사고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지적대로 후기 식민주의 관점에서 그들 사고방식의 근간은 외부세계에 대한 타자화와 대상화에 있다. 제국주의의 착취와 배타의 매커니즘의 변용이 오리엔탈리즘이라면 필자의 짧은 생각에선 칸의 선택은 거기에서 진화된 네오오리엔탈리즘이 작동한다고 보인다. 거칠게 요약하면 과거의 오리엔털리즘이 동양 혹은 그들의 입장에서 제3세계에 대해 신비주의로 포장된 이국 취향을 소비하는 방식이었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 자본주의가 일정 궤도에 오른 후발주자국가들이 비록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으나 어딘지 왜곡되고 기이한 세계라는 인식하에 바라보는 그들의 기이한(?) 취향이 느껴진다. 이는 필자가 유학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자격지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봉준호는 작가로서 훌륭한 감독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기생충’ 역시 대단한 영화다. 리얼리티가 살아있기에 역설적으로 호러에 가까운 봉준호식 장르영화로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너무도 잘 표현했다. 낙수효과가 아닌 홍수가 난 사회 말이다. 감독이 늘 실험하고 도전하는 장인이기를 응원한다. 그리고 작은 영화들을 배려하고 후원하는 일에도 관심이 많은 감독임을 잘 알고 있다. 감독의 후광에 기댄 낙수효과 말고 온전한 작은 영화들의 배급을 위한 일 말이다.

이황석(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 - 아시아투데이 6월 7일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