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증인’, 편견에 대한 우리들의 자화상
영화 ‘증인’, 편견에 대한 우리들의 자화상
  • 한림미디어랩 The H
  • 승인 2019.03.27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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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
이황석(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

영화 ‘증인’은 자폐를 가진 장애우 지우가 한밤중 이웃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을 목격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이로 인해 지우는 증인으로 법정에 서고, 관객은 진실이 무엇인지 가려내는 여정 속에 다양한 인간군상과 만나게 된다. 

위악과 위선으로 반전의 반전을 반복하는 법정드라마 플롯에 익숙해 있는 관객이라도 ‘증인’에서는 좀 다른 느낌을 받게 될 것 같다. 이 영화는 내러티브 중간중간, 등장인물 간의 대사를 통해 관객들을 사유에 빠지게 하는 힘이 있다. 사유는 성찰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어떤 모티브가 되는 장면을 접하면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대화 중에 ‘무엇만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말꼬리를 흐리며 아쉬움을 표하곤 한다. 일종의 공감 정서로서 상대가 느낄만한 안타까움과 회한을 대신 표현한다. ‘증인’에서도 극 중 주인공인 변호사 양순호(정우성 분)는 지우의 엄마에게 자폐를 앓고 있지만 지적능력이 뛰어난 딸을 두고 ‘자폐만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무심코 말한다. 이때 지우 엄마는 ‘그러면 지우가 아니게요’ 라며 담담하게 응수한다. 그 한 문장의 대답에는 지우와 보낸 15년의 시간이 녹아있다. 누구도 그들의 시간을 가늠할 수 없다. 공감이 사회생활에 필요한 처세의 요소가 아니라 능력인 이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주인공 순호의 실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국선 변호를 담당하게 된 살인 피의자를 구명하기 위해 지우의 증언이 효력이 없음을 논증하는 과정에서 ‘정신병을 앓고 있는 소녀의 증언을 증거로 채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말에 지우와 엄마는 다시 한번 더 큰 상처를 받는다. 순호의 말 한마디로 자기만의 세계에 살고 있는 지우의 ‘과잉과 결핍’은 정신병으로 간주된다.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 배제돼야 할 요소가 된다. 진실규명을 위해 지우와 소통하려는 순호의 노력은 이 말을 내뱉은 순간 일종의 수단으로 변질된다. 순호 역시 자신의 실수를 직감했지만 때는 늦었다. 그 목적이 다른데 있을 때, ‘커뮤니케이션’은 상대를 통제하기 위한 일종의 기술에 불과할 뿐 소통이 아니게 된다.

영화 말미엔 꿋꿋하게 일반학교를 다녔던 지우가 특수학교로 전학간다. ‘특수학교에 다니는 반 친구들이 어떠냐’고 묻는 순호의 말에 ‘아이들이 다 이상하다’고 답한다. 지우는 이어 ‘그래서 싫으냐?’는 물음에 ‘정상인 척하지 않아도 돼서 좋다’고 말한다. 이 말이 폐부를 찔렀다. 비단 지우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삶이 허락되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정상인 척하며 살아갈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사회라는 타자의 영역에서 ‘타자를 자기화’함으로써 얻어낼 수 있는 재화와 용역을 통해 생활세계를 이룬다. 사회생활을 위한 장치로써, 정상이라는 자기최면과 각성은 우리의 교감신경을 비대하게 만들었다. 현대인이 앓는 질병 대부분은 지나치게 각성된 교감신경으로 인해 온전히 생명장치의 에너지를 보존하기 위해 작동되는 부교감신경의 둔화로부터 기인한다. 어쩌면 생명 자체가 목적인 순수한 의미의 생명계에서 인류는 이미 정상의 범주를 넘어선 존재들이다. 

사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정상적이지 않은 사회에 대한 은폐에 있다. 특정 부류의 배제를 통해 ‘정상성이라는 라이센스를 확보한 우리 자신은 주류에 속해있다’는 착시를 주기 위한 거대한 장치다. 정상적이지 않은 사회에서 코드화된 정상성이란 비정상의 왜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왜곡된 비정상의 모사가 정상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의 커밍아웃은 현실세계에서 무력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에서 배제돼 특수한 범주에 속하게 될 때 감당해야 할 폭력성은 그 일반의 상상을 넘어선다. 공감은 이미 불가능한 영역으로 유배됐음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는 장애를 기준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지 않았던 과거의 질서와는 다르다. 구별을 통해 영역을 갈라치게 해야만 유지되는 지금의 질서에서 장애우를 교육해야 할 곳은 특수학교란 이름의 배제의 공간이다. 특별함도 모자람도 존중돼야 할 한 개성으로 간주되는 그런 학교는 우리에겐 아직 요원해 보인다. 영화는 어설픈 타협보다 현실을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우리의 자화상이 어떤지 거울 앞에 세운다. 모순투성이인 사회에서 퍼즐의 완성은 과정에 있다. 완성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모순과 모순 사이에 존재하는 사유의 영역에서 희망과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다. 스토리의 완성도도 좋았으나 그보다 모순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너무도 처연해서 아름다웠다. 먹먹했다. 그 대사들을 오랫동안 기억해야 할 이유는 부연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해 보인다.

이황석(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 - 아시아투데이 3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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