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실로 북한이 눈부신 잠재력을 갖고 있으며 언젠가는 경제적, 재정적 강국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트위터에 지난해 올린 글이다. 2차 북·미 정상회담 일정이 잡히면서 그는 다시 CBS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엄청난 경제강국’이 될 기회를 강조했다.
언론 현상을 설명하는 주요한 개념 중 하나가 ‘프레이밍(framing)’이다. 한 사회현상의 아주 다양한 측면들이 백화점의 다양한 코너 상품들이 동시 입고되는 것처럼 우리 머리에 동시다발적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당 이슈의 특정 측면만이 선택적으로 부각돼 우리 머릿속에 각인된다. 한정된 지면과 시간의 제약을 받는 미디어 보도도 이런 프레이밍의 본능을 벗어날 수 없다.
남북 분단과 전쟁의 경험을 가진 우리 사회는 북한에 대한 입장을 놓고 정치권에서 다투거나, 소위 ‘국보법 위반’의 이유로 체포되거나, 혹은 수많은 뉴스거리들이 양산되어 왔다. 그러나 북한이 경제강국의 가능성을 가진 사회로 프레이밍된 사례는 거의 찾기 힘들었다. 반세기 전에 우리 사회에 “잘살아보세” ‘새마을운동’의 구호와 함께 등장했던 남한 사회에 대한 유사 ‘경제강국’ 프레임이 저 멀리 북아메리카에서 북한 사회에 대한 인식의 틀로 고개를 내밀고 세계가 그에 주목하는 형국이 된 것은 여타의 정치적 해석을 제쳐두고 반가운 일이다.
‘악의 축’이라는 북한 프레임이 탄생했던 나라에서 ‘경제강국’ 프레임이 등장한 것도 흥미롭다.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경제적 동기로 충만한 나라인 탓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것일까. 17세기 유럽인들의 북미 이주가 시작된 것이 신교도, 혹은 구교도가 종교적 박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종교적 이유도 있었지만 기근에 시달리던 소작농들이 먹고살 방도를 찾기 위해 신대륙으로 건너온 측면 역시 강하다. 게다가 초기에는 영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된 나라를 만들겠다는 생각 자체도 북미 식민지 주민들의 일반 정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영국이 차, 설탕, 우표 등 식민주민들의 일상용품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하자 경제적 이권이 침해당하는 것에 식민주민들의 분노가 촉발되고 이것이 독립의 기운으로 번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탄생부터 경제적으로 동기부여된 사회에서 북한에 대한 경제강국 프레임이 북핵 해법이라는 모종의 정치적 계산 아래 등장했다고 볼 수도 있다.
프레이밍 등장 배경도 중요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그 경제강국 프레이밍이 현실화할 것인가의 여부가 보다 실질적인 관심사다. 프레이밍의 개념 자체가 현실의 한 측면이 부각되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의 왜곡으로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진행될 현실의 흐름 속에서 사회 여론의 관심 방향을 결정하여 그 현실 흐름을 조정해가는 ‘경제강국 프레임’의 긍정적 기능을 기대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사실상 그 성공 여부는 아무도 장담 못한다. 트럼프가 정작 자신의 미국 사회에 대해 “미국 역사상 최강의 경제”라는 프레이밍을 트위터, 언론 등을 통해 시도했지만 미국 사회의 반응은 별 호응이 없다. 그의 임기 중 분기별 GDP 성장률 4%대 진입은 50년대 초 8%대 성장에 비하면 약과라는 것이다. 프레이밍의 결과는 이처럼 예측불가다. 경제강국 프레임이 60, 70년대 남한 사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북한 현실 변화의 기폭제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주영기 한림대 미디어스쿨 학장-국민일보 2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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