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산을 타다 죽었다
그는 산을 타다 죽었다
  • 한림미디어랩 The H
  • 승인 2019.02.22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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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
이황석(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

“그는 산을 타다 죽었다.” 필자가 20대 때 도서관에서 빌려본 어떤 등반가에 관한 에세이다. 당시 몇 문장 필사해 놓았었는데 노트가 언제 없어졌는지조차 알 수 없다. 책 제목도 기억에 없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하지만 그 문장만큼은 또렷이 기억난다. 위대한 도전자였던 그는 산을 타다 죽었다. 그의 묘비명이다. 산에서 내려와 일상을 살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것도 아니고 은퇴 후 노환으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 것도 아니다. 그는 정열적인 산악인이었고, 열정적으로 산을 타다 죽었다. 한창의 나이 때 그는 죽었다. 입버릇처럼 산에서 죽겠다는 말이 그대로 유언이 됐다. 그는 그렇게 신화가 됐다.

지난 설 연휴, 근무 중 순직한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솔직히 말해서 생전에 고인이 어떤 분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이름조차 몰랐던 것이 미안해 영결식이 끝나고도 며칠이 지난 지금 글을 쓴다. 관심이 인식을 지배한다고 관심 밖의 영역이었다. 인식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생사의 경계가 일상과 함께하는데 어떻게 그렇게도 무심할 수 있었나 싶다. 어쩌면 우리의 무심함이 윤 센터장을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모른다. 향년 51세 한창의 나이에 고인은 유명을 달리했다. 그 죽음이 안타깝다. 응급의료에 대한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고인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업무용 책상에 앉아있었다고 한다. 그는 응급체계 시스템이라는 산을 타다 죽었다.

뉴스를 통해 공개된 고인의 영결식에서 이국종 교수의 추도사를 들었다. 이 교수는 2011년 아덴만 여명작전으로 소말리아 해적으로부터 총상을 입고 구출된 삼호 주얼리호 석해균 선장을 치료해 대중들에 널리 알려졌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은 의식에 분명하게 인지돼 있었다. 미디어의 순기능을 잊은 지 오래인데 새삼 다행이다. 윤 센터장에 대한 그의 애도의 글 마지막 문장은 짧고 강렬했다. “창공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고인이 만든 항공의료체계에 종사하는 이 교수는 자신이 탑승하는 헬기에 ‘아틀라스’라고 새겨 늘 고인과 함께하겠다고 했다. 영겁의 시간을 지구를 떠받치는 고통 속에 보내지만, 땅 위 인간의 삶을 허락한 거인 아틀라스가 바로 고인이라고 이 교수는 말한다. 이 교수의 말대로 살아서도 죽어서도 윤 센터장은 현역이다.

기왕에 글의 서두에서 등산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대한민국의 위대한 산악인 박영석 대장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세계 최초,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는 무의미해 보인다. 형용사구가 필요 없이 그는 위대한 산악인이자 탐험가다. 2011년 안나푸르나 등정 중 눈사태를 만나 실종됐고, 아직도 그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그를 추모하는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그는 그렇게 산이 되었다’이다. 박 대장의 삶과 죽음을 한 문장으로 담아내고 있다. 설산에 묻혀 그는 그토록 사랑했던 산과 하나가 됐다. 

박 대장 이야기를 새삼 꺼내는 이유는 윤 센터장의 삶과 죽음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들은 숙명이라고 여긴 일을 하다가 죽었다. 그들은 죽어서도 자신들이 온 힘을 던졌던 대상과 하나가 됐다. 박 대장은 산이 됐고, 윤 센터장은 항공 의료시스템과 하나가 돼 오늘도 하늘을 날고 있다. 범접할 수 없는 위대한 삶이다.

하지만 박 대장의 도전정신을 기리고 후배양성을 위한 박영석 산악문화센터의 건립은 재정난으로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응급의료 시스템 역시 윤 센터장의 헌신으로 많이 개선됐다지만, 아직도 살릴 수 있는 많은 환자들의 생명을 구하기엔 역부족인 상황이다. 고인들이 돌아가셔도 편히 쉬면서 자신들이 족적을 남긴 분야의 발전을 바라봐야 마땅하겠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죽어서도 마음 졸이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죄스러운 마음이다. 어차피 더디 걸릴 거라면 신화가 되기보다 좀 더 살아 천수를 누리면서 후배들을 독려하는 편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윤 센터장이라는 거인을 잃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나아지는 게 없다면 아니 되지 않는가. 안타까움에 대한 표현이다. 

이황석(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 - 아시아투데이 2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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