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원주시 운곡 '원천석'의 묘역
[역사기행] 원주시 운곡 '원천석'의 묘역
  • 심민현
  • 승인 2015.04.09 0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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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태종 이방원의 스승

 

왕이 돼 스승 찾은 제자를 피해 숨은 ‘은사’

1000여 한시로 자연을 읊고 현실 정치도 고민

 

▲원천석 선생 묘역 올라가는 길.

 

원주시 행구동에 위치한 원천석 선생 묘소는 치악산 자락 아래에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묘소로 올라가는 길 양 옆으로 나무들이 빼곡히 서 있는데 생전에 원천석 선생이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것 같이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킬 기세다.

 

 

▲원천석 선생 묘소.

운곡 원천석 선생의 묘소는 봉분의 크기는 작았지만 묘 양 옆으로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조선시대 유학자 허목은 선생의 묘 앞에서 “군자는 숨어살아도 세상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하더니 선생은 비록 세상을 피하여 스스로 숨었지만 세상을 잊은 분이 아니었다. 변함없이 도를 지켜 그 몸을 깨끗이 하였다”고 말했다 한다.

선생의 묘 앞에 서면 이 말의 의미를 실감하게 된다. 양 옆의 넓은 공간에 볼록 솟은 작은 봉분이, 자신의 몸은 보이지 않게 산속에 숨겼지만 그 절의만큼은 꼿꼿하던 선생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운곡 원천석 선생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은사(벼슬하지 아니하고 숨어 살던 선비)로 본관은 원주, 자는 자정, 호는 운곡이다. 운곡이라는 호는 선생이 직접 지은 것으로 부귀공명을 버리고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생활한다는 뜻이다.

어려서부터 재명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 있고 학문이 해박하였다고 한다. 국자감 진사가 되었으나, 고려 말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였다.

 

운곡 선생과 태종의 관계

운곡 선생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조선 제 3대 왕인 태종 이방원과의 인연이다.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 운곡 선생이 태종의 스승이었다는 기록은 여러 군데 있는데 조선 제 18대 왕인 현종이 1673년 직접 내린 칠봉 서원 사액 제문에, 〈태종 대왕께서 옛 스승이었던 은혜를 절실하게 생각하시어···〉라고 하여 운곡 선생과 태종이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운곡 선생과 태종의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장소가 하나 있는데 바로 각림사이다. 두 사람의 생애동안 만남을 가진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각림사는 신라시대 때 창건되어 고려와 조선을 거쳐 번성하다가 임진왜란 때에 화재로 불타 버린 뒤에 폐쇄된 절이다. 지금의 횡성군 강림면 부곡리 강림 우체국 자리이다.

이 절에서 태종은 공부를 한 적이 있다. 정사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정도전과 가까웠던 운곡 선생에게 태조 이성계가 이방원의 공부를 맡겼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태종이 왕이 된 후 운곡 선생을 벼슬에 모시고자 직접 치악산을 찾아 각림사를 거쳐 운곡 선생의 거처로 올라오자 운곡 선생은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해 만나주지 않았다. 태종은 3일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운곡 선생이 계신 산을 향하여 절을 하고 갔다 하여 후세사람들은 태종이 절을 한 산을 배향산이라 하고, 태종이 원통해하며 눈물을 흘리며 넘었던 산 고개를 원통재라고 불렀다. 태종이 3일간 머물렀던 곳을 주필대, 또는 태종대(太宗臺)라 한다. 특히, 태종대는 강원도문화재자료 제16호로 지정하여 보호 관리하면서 운곡 선생의 절의 정신을 선양하고 있다.

▲운곡 원천석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 창의사.

 

운곡 선생의 문학 세계

일반적으로 원천석 선생은 고려 말 격동기를 살며 신흥왕조인 조선을 섬기기를 거부하고 은둔 생활을 하며 폐허가 된 개경의 옛 궁궐터를 둘러보고 시조를 읊은 인물정도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문학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일생 1144수라는 방대한 양의 한시를 남겼다.

그의 문학 세계는 은일 지향과, 적극적인 현실 참여 등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운곡은 은둔생활을 했지만 끊임없이 당대의 현실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 때문에 그의 문학에는 은일인으로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구가하는 서정적 정서로 충만한 작품과 지속적으로 당대 현실 정치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작품이 뒤섞여 있다고 말했다. 즉 운곡은 거의 일생을 초야에 묻혀 지냈다 해서 한가롭게 자연만 노래하지 않았으며 당대 지식인으로서 끊임없는 현실 고민을 했으며 이를 시로 남겼다.

 

▲창의사 입구에 있는 원천석 선생의 시비.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90여년의 세월을 살면서 어지럽고 배신이 난무하는 세상을 피해 청고한 은거 생활을 하면서 끝까지 고려에 대한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올바른 고려 망국의 기록과 조선 건국의 기록을 남긴 운곡 선생을 현대 사학자들은 고려 말의 삼은(정몽주, 길재, 이색)보다 더 높게 평가하고 있다. 과거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과 지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보면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긴하다. 그러나, 700여년 전의 인물일지라도 그가 남긴 정신세계의 자취는 현대인에게 은은한 의미로 부활할 수 있음을, 운곡선생의 작은 봉분에서 느끼는 것은 기자만이 아닐 것이다.

심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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