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여행] 비리유치원 블랙리스트
[역사 여행] 비리유치원 블랙리스트
  • 한림미디어랩 The H
  • 승인 2018.11.20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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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이 비리유치원 명단을 공개하면서 학부모들의 여론이 뜨겁다. 공개 이후 한국유치원총연합회는 “모든 유치원이 비리유치원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며 명단공개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법원은 “신청인의 명예를 중대하게 침해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이를 기각했다. 교육청들의 감사를 통해 적발된 유치원들의 명단을 작성·공개하는 것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활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케임브리지 영어 사전에 따르면 동사로서의 블랙리스팅은 기피하거나 믿을 수 없는 사람, 국가, 기타 대상들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다. 박 의원의 기피 대상 유치원 목록은 사회에 유용한 블랙리스팅의 결과인 셈이다. 

셰익스피어 이후의 영국 인기 극작가로 알려진 필립 메신저의 17세기 작품 ‘부자연스러운 싸움(Unnatural Combat)’에서 처음 사용되었다는 ‘블랙리스트’는 현실 세계에서는 영국 민주주의의 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찰스 1세의 사형 판결에 서명했던 59명의 법관 등 관계자 명단을 지칭하는 데 처음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다. 왕정 복귀 이후 찰스 2세 때 이 명단에 오른 사람들은 심지어 이미 사망한 올리버 크롬웰의 경우 사후 처형까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이 블랙리스트는 노동계에서 사용되었는데 18세기 미국 광산 노동자들 중 파업에 참가한 이들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면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하는 현실이 산업혁명기를 맞기도 전인 미국 광산촌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가는 곳마다 일자리를 거절당한 노동자가 자살하는 등 문제가 이어지자 미국 정부는 한참이 지난 1935년 노동관계법을 제정해 노동자의 노조 지지, 사용자 비판을 이유로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 법이 발효된 이후 해고무효 소송 등이 빈발하자 블랙리스트는 글자 그대로 은밀한 행위로 숨어들어 그 공공연한 행적을 감추었다.

블랙리스트는 신문에 게재돼 정부 정책에 활용되기도 했다. 1665년 옥스퍼드 가제트라는 이름으로 처음 발행돼,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으로 알려진 런던 가제트지에 1차 세계대전 기간 중 중립국의 특정 기업과 개인들의 명단이 게재된다. 영국 정부는 국민들로 하여금 이 신문에 실린 명단의 업체들과는 통상 거래를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1950년대 매카시즘 열풍이 한창일 때 미국의 할리우드에서도 블랙리스트는 존재했다. 공산주의에 동조한다고 여겨진 영화작가 등 엔터테인먼트 산업 종사자들 150여명의 취업 활동을 막기 위한 것으로, 60년대까지 이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세기가 흐른 뒤 박근혜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구속으로 이어지는 등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기억도 추가됐다.

300여년의 블랙리스트 역사 속에 이번 비리유치원 명단을 놓고 본다면, ‘역사의 발전’이란 말을 실감케 한다. 수세기 전 왕정으로 복귀한 영국의 왕이 독자이자 이용자였던 블랙리스트가 광산주, 기업가, 영화산업계 오너, 정부 기관 등의 이용자 그룹을 거쳐 학부모라는 소비자, 시민그룹으로 대변되는 비권력자를 위한 데이터베이스로 탈바꿈을 했기 때문이다.

주영기 한림대 미디어스쿨 학장-국민일보 11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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