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원] 정체성이 비교의 굴레를 벗을 때
[한림원] 정체성이 비교의 굴레를 벗을 때
  • 한림미디어랩 The H
  • 승인 2018.09.18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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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정체성, 대학의 정체성, 한국교회의 정체성. ‘정체성’이라는 용어는 개인이나 집단이 본래 가지고 있던 소중한 것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다. ‘정체성의 약화’. ‘정체성의 혼란’, ‘정체성

의 위기’, ‘정체성을 찾자’ 등의 용례를 보면 정체성이 문제에 봉착하기도 하며, 온전한 상태의 정체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당위적인 입장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당위적이라는 것은 정체성 논의가 지배의 수단, 정치적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청소년기의 가치있는 고민들이 정체성 혼란의 징표로 무시되고, 다양한 견해가 국가나 종교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새로운 민족과의 만남이 민족정체성의 위기로 해석되기도 한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 정체성이 거론될 때는 분명 무언가 문제가 있을 때이다. 사실 웬만해선 입에 잘 올리지 않는 용어이다. 그런데 정체성을 말하게 하는 문제가 반드시 정체성 자체의 문제인 것은 아니다. 실제 개인이나 집단의 상황이 웬만한 변화로는 해결될 수 없는 총체적 위기에 처해있을 때 우리

는 정체성에서 답을 구한다. ‘나는(우리는) 누구인가’, ‘내(우리)가 지켜야할 가치와 존재의미는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을 던지게 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은 대개 타자와의 비교라는 형태를 띠게 된다. 한국과 같은 비서구사회에서 정체성은 무엇보다도 서구와의 비교가 주된 내용이다. 서구와 무관한, 그리고 가능하면 서구보다 우수한 무언가로 우리를 정의하고 싶어한다. 이는 결국 서구에 대한 선망, 아니면 우리 민족의 우월함에 대한 집착을 낫는다. 우리는 특별한 민족이라는 관념은 유대인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 가장 우수한 언어인 한글을 가진 민족,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영웅적인 복구를 이루어낸 민족과 같은 얘기를 통해 우리의 의식에 스며들었다.

비교와 우월함에 대한 집착은 주류에 속하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이다. 또한 주류에 대한 선망의 이면에는 자신과 비슷하거나 약한 지위에 있는 이들, 주류에 속하지 못한 이들에 대한 무시나

증오가 있다.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에 다름 아니다. 남성중심 질서를 위협하는 여성, 온전하지 못한 신체와 정신을 가진 이들, 전통질서를 위협하는 사회주의자, 서구 대중문화의 유혹에 빠진 청년 등 다양한 집단이 정체성의 확립에 장애가 되는 존재들로 간주된다. 문제는 비교와 평가에 대한 몰두가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는 점이다. 보다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비교가 배제된, 비교와 무관한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다. 이는 곧 자신과 남을 흔쾌히 인정하는 정체성이다. 정체성이라는 이름은 아니더라도 개인 또는 집단의 자존감, 자부심,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필요하다. 게다가 우리의 삶을 가치있게 하는 이 정체성은 부, 권력, 땅과 달리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자원이다. 비교와 위계에서 벗어날 때 정체성은 경쟁에 시달리는 현실 뒤편의 작은 안식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엄 한 진(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엄 한 진(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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