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 자유, 정파. 언론은 무엇을 우선했는가?
안전, 자유, 정파. 언론은 무엇을 우선했는가?
  • 한림미디어랩 The H
  • 승인 2021.01.05 09: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스를 배우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광화문에 세워진 ‘차벽’에 대한 보도 차이

[뉴스를 배우다]는 한림대학교 미디어스쿨 커뮤니케이션 개론 수강생들이 수업을 통해 언론의 정파성에 대해 확인한 뒤 하나의 주제를 스스로 정해 보도 차이를 비교/분석하며 느낀 점을 남긴 글입니다. [편집자말]

훗날 시간이 지나, “과거 2020년. 사회를 관통한 키워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나는 단연 “코로나19”라고 말 할 것이다. 예기치 않게 찾아온 ‘펜데믹’은 사람들의 신체 이외에도 사회에 침투해, 소상공인들의 터전을 위협했고, 따스함에 활발함이 만개해야 할 봄날의 거리는 마스크 속 굳게 닫힌 입처럼 침묵의 거리로 변모했다. 코로나19는 시민들의 생명적, 경제적 안전을 위협했고 궁극적으로 일상의 변화를 일으켰다. 당연히 나의 일상도 크게 변화했다. 군대에서 꿈꾸었던 낭만적인 캠퍼스에 대한 로망은 환상이 됐고, 활력이 넘쳐야 할 대학의 강단에는 적막함이 감돌았다.

생명을 위해 자유의 거리를 막아 선 공권력

3개월 전 8월의 여름, 대규모 감염병으로 인한 국가 재난상황에서 보수단체는 문재인 정권을 규탄하는 ‘8.15 광화문 집회’를 개시했다. 수많은 보수단체들이 해당 집회를 위해 광화문에 몰렸고, 2월 신천지교회發 코로나19 감염병 확산 이후 잠잠해져 가던 신규 확진자 수는 광화문 집회 이후로 급격히 증가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1단계에서 2단계로 격상될 정도로 상황은 심각해져갔다. 감염병 확산세가 증가하는 상황 속에서 보수단체는 10월 3일 개천절에 다시 한 번 정권을 규탄하는 대규모 집회를 예고했다.

이에 정부는 8.15광화문 집회發 지역감염 확산사태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공권력을 투입해 보수단체가 예고한 10월 3일 ‘개천절 집회’를 무산시켰다. 광화문 광장에 경찰차벽을 세워 집회 모임을 원천 차단한 것이다. 이를 두고도 정치권과 시민들은 두 주장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자유대한민국을 외치는 보수단체들은 ‘국가가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것은 헌법에 명시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 주장했고, 그와 반대로 현 정부와 같은 이념을 공유하는 진보진영은 ‘국민의 생명에 잠재적 위협요소가 될 가능성이 있는 집회를 차단한 것은 공권력의 정당한 사용’이라는 주장을 고수했다.

이 차벽은 정파적으로 상이한 관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첫째, 개천절 집회는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주장하는 보수단체의 집회였다. 이걸 막는 것은 보수단체의 반발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고 결국 정파적 논쟁으로 발전할 여지가 충분했다. 둘째, 지금의 정부의 방역정책을 방해하는 집회가 될 수 있다. 진보정권의 방역정책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되는 보수단체의 집회에 진보진영이 반발하지 않을 리 없었다.

실제로 정치권에서 경찰의 차벽대책을 두고 여야는 다른 주장을 했다. 보수정당 국민의 힘 박대출 의원은 “민주 외치는 정권의 반민주 현장”이라며, 경찰의 차벽대책을 ‘최루탄이 난무하던 40년 전 독재군사시절’에 비유했다. 공권력을 투입해 자유집회를 막아버린 정권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에 여당인 더붐어민주당 역시 야당의원들의 비판에 반박했다. 여당은 “광화문 광장을 둘러 싼 차벽은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라며 국민생명권을 우선시해야함을 주장했다. 하나의 사실을 두고도 두 정치진영이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유주의를 꺼내들 것 같았던 보수언론, 사회책임주의를 옹호 할 것 같았던 진보언론

정파적으로 나뉘어져있는 것은 국회나 거리의 광장뿐만이 아니었다. 언론 역시 정파적, 이념적으로 양분돼있었다. 나는 방역을 위한 정부의 차벽 대책에 대해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이 그들의 정파성과 정파에서 구축하는 이념에 따라 ‘펜데믹 상황 속 공권력의 개입’에 대한 보도를 달리할 것이라 예상했다.

보수언론은 같은 이념을 공유하는 보수단체를 옹호하고, 진보정파를 공격하기 위해 대한민국헌법에 명시된 헌법‘제21조 ①모든 국민은 언론ㆍ출판의 자유와 집회ㆍ결사의 자유를 가진다.’는 점을 들어 국민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에서 파생된 집회의 자유를 침해한 정부의 차벽대책을 강도 높게 비판하리라 생각했다. 진보언론은 ‘헌법 36조 ⑥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점을 들어 같은 진보이념을 공유하는 현 정부의 차벽대책을 두둔하거나 옹호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확실한 이슈부각 조선일보, 불리해도 무보도는 무(無)! 한겨레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예상대로 보수언론인 조선일보는 文정권이 광화문에 세운 차벽을 두고 보수정치인과 지식인의 주장을 지면과 인터넷기사에 실어 나르며, 표현의 자유가 훼손됐음을 기사제목과 사설란을 통해 수위 높게 비판했다. 기사의 양도 많았다. 네이버에 ‘차벽’을 검색하면 사설을 제외한 조선일보의 기사는 49개가 나왔다. 10월 3일 이후부터 과제를 작성하는 23일까지 하루 1개 이상의 차벽관련 기사가 나온 것이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진보언론인 한겨레였다. 진보언론답게 진보정치인의 말을 지면과 인터넷기사에 옮김으로써, 진보정권의 공권력개입을 두둔하기도 하였으나, 현 정권의 공권력사용인 차벽대책에 대한 논의와 비판도 함께 보도했었다. 물론 그 비판의 수위는 조선일보만큼 높지 않았다. 한겨레가 내놓은 ‘차벽’관련 기사는 17개였다.

한겨레와 조선일보간 보도한 차벽기사의 양적측면을 고려해 각 언론사가 ‘정파적인 이슈부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분석하려했다. 양적측면을 고려하면, 조선일보의 차벽관련 기사가 한겨레의 차벽기사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조선일보가 현 정권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높이고자 다량의 보도를 한 것인지, 아니면 진보정권에 불리하게 작용될 수 있는 사안이라 한겨레가 이슈부각을 의도적으로 소홀히 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존재했다.

우선, 두 언론사 간의 규모차이가 존재하기에 양적측면으로 접근하는 점이 유의미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렇기에 일정기간동안 두 언론사가 보도한 기사의 총량대비 ‘차벽’관련 기사가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는 지를 통해, 정파성에 따른 이슈부각의도를 확인해봤다.

‘이슈 부각의도’에 대한 분석은 차벽에 관한 기사가 가장 많이 나왔던 10월 1째 주 (10.03일 – 10.09일)를 기준으로 진행했다. 우선 분석을 위해 기사자료들을 수집했다. <빅카인즈>에 ‘차벽’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한 뒤 두 언론사의 해당 기사를 모았다. 워낙 많은 기사가 나왔으나, 분류작업을 통해 차벽기사의 범위를 좁혔다.

이후 두 언론사가 보도한 기사의 총량을 구해야했다. 보편적으로 조선일보와 한겨레는 ‘차벽’기사를 [정치/사회]로 분리했기에 나 역시 두 언론사가 10월 1째주 동안 보도한 [정치/사회]관련 기사의 총합을 모았다.

광화문에 차벽이 세워졌고, 차벽기사가 가장 많이 나왔던 10월 1째 주에 조선일보는 825개의 [정치/사회] 기사를 보도했다. 동일 기간 동안 한겨레신문은 427개의 [정치/사회]기사를 보도했다. 이 기간 동안 조선일보가 보도한 ‘차벽’관련 기사는 29개이고, 한겨레가 보도한 ‘차벽’기사는 13개다. 같은 기간 동안 두 언론사가 내놓은 [정치/사회]보도기사를 100개로 환산했을 때, 조선일보는 차벽관련 기사를 4개 작성했고, 한겨레신문은 3개를 작성한 것이다. 미약한 차이지만, 조선일보가 더 많은 기사를 냈다고 생각 할 수 있다. 그러나 인터넷기사로 이 차이를 단정 짓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편집이라는, 공간적 제약이 있는 신문지면을 살펴봤다.

위와 동일기간(10.03-10.09) 동안 조선일보는 7건의 차벽관련기사를 지면에 실었다. 특히 개천절 집회가 예고됐던 10월 3일에는 <600m 가는데 6번 검문...시민들 “80년대 독재시절 거리 보는 듯”>이라는 기사제목을 1면 헤드라인으로 달아 정부의 차벽대책을 강하게 비판하는 편집을 보였다. 한겨레는 조선일보보다 하루 늦은 10월 4일부터 지면에 차벽관련 내용을 보도했다. 한겨레는 10/4일 발행신문 6면에 <‘광화문 차벽’ 논쟁, 한글날 2라운드 예고>라는 기사를 개제했다. 한겨레는 조선일보보다 늦은 지면보도를 했지만 한겨레 신문지면에 실린 차벽관련보도는 동일기간 조선일보보다 한 개 더 많은 8개였다.

결과적으로, 인터넷기사까지 포함하면 조선일보가 차벽에 대해 더 많은 기사를 작성했지만, 지면이라는 한계가 있는 부분에서는 한겨레가 더 많은 차벽기사를 지면에 노출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일보는 정파성에 충실하게 이슈를 부각했고, 한겨레는 정권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보도를 소홀이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대통령을 영점 조준한 조선일보, 진보정권을 수호한 한겨레

조선일보는 보수단체의 개천절 집회가 무산된 10월 3일부터 <경찰버스 300대로 봉쇄된 광장... “광화문이 재인산성 됐다”>, <600m 가는데 6번 검문...시민들 “80년대 독재시절 거리 보는 듯”> 이라는 제목들의 기사를 보도하며 정권에 대한 비판을 시작했다. 지금의 정권이 보수단체의 집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경찰과 경찰버스를 동원해 세운 ‘차벽’을 ‘재인산성’이라 표현하고, 집회를 무산시키는 차벽대책을 80년대 군사독재시절과 다름이 없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정권을 더 강하게 비판하기 위해 대통령을 조준하는 듯한<文대통령, 5년전 “경찰 차벽은 반헌법적”...'재인산성'엔 뭐라 할까>라는 제목의 기사도 보도했다. 과거 보수정권인 박근혜정부가 시위와 집회를 막기 위해 세운 경찰차벽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던 文대통령(당시 민주당대표)의 당대표시절 발언文(“집회, 시위를 자유롭게 할 수 없는 나라는 독재국가다”)을 현재로 불러와 오버랩 시킨 것이다. 보수언론이 文정권에 ‘내로남불’ 프레임을 씌우려는 시도로 해석됐다.

한겨레 역시 광화문에 들어선 경찰차벽에 대한 기사를 내놓았다. 한겨레는 광화문 경찰차벽 건설의 원인을 제공한 보수단체에 대한 비판과 정부의 차벽대책의 정당성을 알리는 듯 하는 기사제목을 구성했다. <법원, 한글날 도심집회 금지도 “정당”> 또는, <“개천절 불법집회 빈틈없이 차단”…문 대통령, 경찰 대응 긍정 평가>, <집회중계 화면마다 ‘후원 모금중’…자금난 보수단체의 민낯>라는 기사를 내보내 정권을 수호함과 동시에 보수단체의 치부를 들어내는가 하면, <노영민 “광화문 집회 주동자는 도둑놈이 아니라 살인자”>라는 정부 비서실장의 강한 어조의 말을 인용해 기사제목을 다는 등 보수단체에 공격적인 스탠스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겨레는 보수진영에 대한 비판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글날도 차벽에 “자유침해 과잉” “생명보호 정당” 논란 가열>이라는 기사를 내보내며, 일부 중도적인 입장도 취했다. 10월 7일에는 중도적인 입장을 넘어 <“수천명 모일 것” 경찰 항변하지만 ‘광화문 차벽’이 최선일까>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기도 했다. 한겨레는 현 정부의 차벽대책이 과연 최선이었는지, 다른 대안은 없었는지에 대해 묻고 있었다. 언론사 이름을 가리고 기사제목만 본다면, 이 기사가 한겨레에서 보도된 기사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기존의 “특정 언론은 이런 정파성을 갖고 있으니, 이렇게 보도할 것이다.”라는 관념이 조금 깨진 것 같았다.

물론 경찰차벽에 대한 보수언론의 보도방향은 나의 예상과 맞아떨어졌다. 이념적으로 文정권과 다른 진영에 포함됐다고 인식되는 조선일보가 정권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보수야당을 대변한 조선일보, 진보정권의 방역의지를 대변한 한겨레

누구의 말을 또는 누구의 관점을 기사에 옮기느냐에 따라 이 언론사가 추구하고자하는 보도방향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조선일보와 한겨레가 누군가의 말을 인용해서 차벽을 바라보고, 어떤 방향으로 보도하는 지 알아보고자 했다.

우선 조선일보는 총 54명의 말을 인용했다. 여야정치인을 모두 다룬 기사는 중복으로 표기했기에, 기사양보다 인용된 사람의 수가 더 많다. 조선일보가 가장 많이 인용한 인물은 야당인사(11회)였다. 야당인사들은 정부의 경찰차벽에 대해 비판적이다. 이걸 기사에 싣는 것은 단연 언론사의 정파성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그 뒤로 조선일보의 기사에 자주 등장한 사람들은 ‘사회평론가+학계+지식인(9회)’이었다. 이들 중에는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진인 조은산’과 과거 진보논객으로 통했던 ‘진중권 전 동양대교수’가 자주 등장했다. 조은산은 정부의 정책에 대해 촌철살인을 날리기로 유명한 인플루언서 블로거다. 진중권 전 교수의 경우, 매주 수요일 중앙일보에 정권을 비판하는 칼럼을 개제하고도 있다. 이 둘 모두 문재인 정권에 비판적인 논조를 갖고 있다. 이들의 말을 기사에 개제함으로써, 결국 조선일보가 추구하는 가치는 진보에 비판적인 보수진영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조선일보는 노영민 비서실장의 기사를 세 건이나 보도했는데, 당시 노영민 비서실장이 보수단체를 ‘살인자’라고 표현한 것이 화제가 됐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비서실장으로써 적절한 표현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을 수도 있다. 조선일보는 노 비서실장의 발언을 계속 미디어에 노출시키며 정부인사와 내각에 대한 반감을 촉발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한겨레의 경우 17개의 기사 중 24명의 말을 인용했다. 특히 경찰청장의 말을 기사에 가장 많이 반영했다. 경찰청장의 발언들, ‘경찰차벽은 방역을 위해 필요했다’거나, ‘필요하다면 한글날에도 차벽을 세워 광화문을 봉쇄하겠다.’는 말들을 기사에 게재했다. 방역에 대한 현 정부에 강인한 태도를 기사에 반영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겨레가 경찰에 의견을 많이 담은 것에도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경찰은 정부의 명령을 받기는 하지만, 공권력의 개념이다. 즉 공공의 안녕을 상징하는 민중의 지팡이이다. 이들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한겨레는 정부가 공리를 더욱 신경 쓰고,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기 위해 방역정책에 최선을 다한다는 느낌을 주려고 노력한 것 같다.

결과적으로, 두 언론사는 정치인의 말을 담아내는 데에서 차이가 있었다. 조선일보는 보수야당 인사의 말을 주로 담았다. 한겨레는 조선일보와 달리 한 기사 안에서 여야의 목소리를 골고루 담았다. 여당의 언급이 있으면, 야당의 언급도 같이 담았다. 한겨레는 조선일보에 비해 한 쪽 정파의 일방적인 주장만을 인용한 기사가 적었다.

진보정권 맹비난한 조선일보의 사설과 진보정권에 충언한 한겨레의 사설

솔직히 이야기 하자면, “과제 주제선정을 잘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두 신문사가 오피니언에서 보여주는 제목만 놓고 보면, 정파성을 느끼고 구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차벽이 세워졌던 10월 3일 이후로 가장 많은 기사가 나왔던 시기의 사설만 보더라도 그렇다. 우선 언제나 예상되는, 오히려 예상돼서 재밌는 조선일보의 10월 첫째 주 사설 제목들이다. <광화문 ‘재인산성’ 對 대공원 만차, 명백한 코로나 정략>, <광장에서 태어난 정권, 광장이 두려운가>, <어느새 우리는 단풍놀이까지 지시받고 있다>, < ‘재인 산성’, 그 진기한 풍경을 또 보고 싶다>라는 사설제목을 통해 현 정권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늘 조선일보의 사설란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정말 제목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권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조선일보에 칼럼을 기고한 김규나 작가는 “광장에서 태어난 정권이 광장을 허락할 리 없다.”며 ‘독재’마저 언급했다. 사실상 민주정부 3기로 표현되는 정부에 ‘독재’라는 프레임을 씌우면 아주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조선일보의 이번 사설과 칼럼의 논조를 한줄 평으로 표현하자면 “조선이 조선했다.”정도가 될 것 같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한겨레의 사설 및 칼럼의 논조다. 분명 내가 생각하는 진보언론사라면 현 정부를 두둔하거나 보수단체에 대한 무차별적인 비판이 섞인 칼럼‧사설을 내놓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보수단체에 대한 비판은 적고 정권에 대한 비판과 우려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지면에도 실렸으며, 광화문에 차벽이 세워진 다음 날 한겨레 오피니언에서 처음 보도된 차벽 칼럼이다. <[한겨레 프리즘] 질문을 불허하는 방역사회 / 엄지원>. 이 칼럼의 핵심 논조는 방역에 왜 차벽까지 필요하냐는 질문에 대해 정부나 여당으로부터 모두가 납득 할 만 한 답을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부의 차벽대책이 단순히 코로나방역을 위해서라는 이유만으로는 차벽건설의 설득력을 갖추기 어렵다는 것이 핵심 논지다. 이 점을 한겨레가 짚고 넘어간 것은 굉장히 유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추가로 해당 칼럼은 추석명절에 국민들에게 본가방문을 자제해주길 요청하면서, 정작 본인은 봉하마을로 향한 이낙연대표에 대한 비판도 들어있었다. 내로남불 프레임에 스스로 빠져들지 말라는 말처럼 느껴졌다. 조선일보만큼 강도 높은 비판은 아니었지만, 진보진영을 향한 비판의 메시지는 확실히 전달받을 수 있었다.

네이버의 네티즌들 역시 나와 생각이 같았는지, 기사의 댓글 란에 ‘의외다.’라는 의견을 많이 달았다. “이렇게 기사 쓰면 회사(한겨레)에서 안 잘려요?”라는 댓글도 존재했다. 그만큼 이 칼럼은 기존의 한겨레가 추구하던 진보노선을 벗어났다고 느껴지는 사설이었다.

위 내용의 칼럼 이외에도 한겨레 사설의 논지는 대부분 중립에 가까웠다. <[사설] ‘방역-집회 자유’ 균형 이룰 합리적 대안 찾을 때다>라는 사설이 있었다. 코로나와 같은 감염병은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고, 이런 상황 속에서 균형을 생명권과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의 구심점을 찾아야한다는 것이었다. 이 논조가 한겨레사설의 핵심 포인트였다.

한겨레의 사설란만 본다면, 기존의 생각해오던 진보언론사라는 관념에서 일정부분 벗어나기도 한 보도행태였다. 정파성. 그것은 불문율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다른 정권, 같은 산성’에서의 보도행태

2020년 광화문에 시위와 집회를 막기 위한 ‘차벽’이 세워지기 이전에도 광화문에 경찰차벽이 서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광화문 광우병 소고기 파동 당시에 이명박 정부가 공권력을 투입해 집회를 무산시키고자 경찰차벽과 컨테이너 벽을 세웠던 걸 말이다. 현재 2020년에는 보수언론사가 본인들과 다른 이념을 갖고 있는 진보정권의 차벽을 향해 날카로운 펜을 들이밀고 있다. 과연, 조선일보는 과거의 본인들과 같은 이념을 갖고 있던 보수정권에 대해서는 어떻게 기록했을까.

과거 2008년 6월 이명박 정부의 차벽대책인 ‘명박산성’기사를 찾아봤다. 우선 한겨레신문은 본인들이 갖고 있는 정파성에 충실할 정도로 거센 비판을 했었다. 한겨레는 정권이 바뀌자 공격하는 수위도 바뀐 것이다. 한겨레신문은 2008.6월.10일부터 한 달 뒤인 2008년.7월.10일까지 무려 31개(네이버뉴스에 ‘컨테이너’로 검색)의 ‘명박산성’에 관한 기사 및 사설을 내보냈다. 한겨레가 차벽을 비판하는 논조는 하나였다. ‘민주주의 후퇴’였다. 국민의 소리를 듣지 않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뤘다. 당시 한겨레가 보도한 <[시국선언] 한국작가회의 시국선언 514명>이라는 기사에는 국민의 의사표현과 자유를 억압하는 보수 정부에 대한 시국선언문도 그대로 적시돼있었다.

서로가 재인산성과 명박산성이라고 부르는 2020년에 세워진 차벽과 2008년에 세워진 차벽을 통해, 언론은 자신들과 다른 이념을 갖고 있는 정권에 지극히 비판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광화문에 컨테이너 벽과 경찰차벽이 세워졌던 2008년의 조선일보 기사는 어땠을까. 사실 이 점에 대해서 굉장히 궁금했다. 조선일보는, 국민들을 적으로 돌리는 기사를 쓸 것인가. 아니면, 임기 초반 권력이 가장 강한 시기의 대통령을 비판할 것인가 말이다. 나는 해당기간의 조선일보 기사를 찾아본 뒤 내 눈을 의심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조선일보는 해당기간 동안 어떤 기사도 올리지 않았었다. ‘명박산성’, ‘컨테이너’,를 검색해 봐도 네이버는 “검색결과가 없습니다.”라는 문구만 되풀이했다. 시스템의 오류라 생각된 나는 조선일보의 공식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조선일보의 지면PDF검색 결과, 광우병파동에서 비롯된 2008년 6월 광화문 시위에 관한 기사들이 있었다. 당시 조선일보 기사의 논조는 2008년 한겨레와는 정반대였다. 과거 정부가 세운 차벽을 부정적으로 보이게 하는 ‘컨테이너’ 또는 ‘명박산성’이라는 단어는 쓰지도 않았다. 오히려 조선일보는 광우병 시위대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는 보도를 내놓았다. 2008년 6월 11일 조선일보는 <쇠파이프 등장 어제 새벽 광화문 시위 충돌 정부 "법 지킬 조치 취하겠다">라는 기사를 지면 1면에 올린다. 시위대가 쇠파이프를 휘둘러 전경들이 부상을 입었다는 기사, 시위대끼리 서로 폭력을 휘두르지 말자고 논쟁한다는 기사 등이 주를 이뤘다.

이는 2020년의 조선일보와는 굉장히 대조되는 기사의 논지다. 과거 보수정권의 편에 서던 조선일보는 진보정권으로 바뀌자 거리로 나온 보수집회단체의 편을 들기 위해 펜을 들었다.

결국 언론사는 정권이 갖는 이념 혹은 정파에 따라 비판의 강도를 높이거나 낮추고, 이슈를 전환시킴으로써 자신들과 같은 이념을 공유하는 정권에 대한 피해를 줄이려고 한 행태를 목격할 수 있었다. 표현의 자유나 생명권에 대한 가치는 정파성 서린 보도를 위해 필요한 보충요소 또는 보충근거일 뿐이었다.

결국 새는 두 날개로 날아간다

조선일보는 이번 차벽보도를 통해 정파에 충실한, 어떻게 보면 굉장히 조선일보 스러운, 일관성 있는 보도를 했다고 생각한다. 정파적으로는 그렇다. 자유결여에 대한 문제의식을 통해 이 사회의 민주시민들이 반드시 고민해봐야 할 ‘자유’의 가치에 대해 상기시킬 수 있었다고도 생각된다.

한겨레는 이번 보도를 통해 단순 어용언론이라는 오명을 벗어던진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시민들의 관점은 워낙 다양해서, 이번 ‘차벽’ 보도를 두고 한겨레에게 조‧중‧동 2중대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존재하지만, 때로는 이렇게 이념과 정파에 관계없는, 성역 없는 보도를 통해 확증편향에 사로잡혔을지 모를 일부 매체이용자들에게 다양한 가치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사가 본인들의 정파성을 탈피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언론사가 정파성을 벗어던지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존재하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언론사가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다.

한겨레가 현 정권의 경찰차벽 및 광화문 통제에 대해 비판적인 보도를 하자, 이 보도를 호기롭게 바라보는 네티즌들도 있었다. 그러나 몇몇 네티즌들은 댓글을 통해 해당 사설의 논조를 비판했다. 아무래도 한겨레의 해당보도를 비판한 네티즌들은 정치적으로 진보적 이념을 갖고, 한겨레의 기사나 사설을 볼 가능성이 크다. 진보정파의 입장이나 생각을 대변하지 않는 진보언론사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다가오고, 결국 분노로 표출 된 것 같다.

이런 점을 들어 언론사가 정파적 노선을 선택하고 오랜 시간동안 그 노선을 고수해 나갔을 때. 이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언론이 정파성을 띄는 데에는 지배구조의 탓도 존재하겠지만, 독자들의 기대에 충족하기 위함도 있어 보인다. 독자들이 원하는 보도를 하지 않았을 때 독자층의 이탈을 감수해내는 것은 언론사에게 쉬이 여겨지는 일이 아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언론사들은 대중의 눈길을 끌고자 정파성 띄는 보도를 시작했지만, 이제는 그 정파적 보도에 익숙해진 독자들이 언론사의 발목을 잡고 놔주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시대의 지성 리영희 선생은 “새는 좌와 우의 두 날개를 통해 난다”라고 했다. 언론의 보도 역시 좌와 우로 나뉘어 하나의 사실을 두고도 다른 주장과 논지를 펼치고 그에 맞게 프레임을 조직하고 있다. 언론의 정파성이 시민들을 확증편향으로 내몬다는 주장도 있지만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때로는 정파적인 언론을 통해 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현상을 한 가지 관점만이 아닌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언론의 정파성을 지적의 대상으로만 여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다각도의 시각으로 이슈와 사안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정파적 언론 역시 민주주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한 쪽 이념에 지극히 몰두한 나머지 정치이익집단에 편승해 도구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은 문제 삼아야겠지만 말이다.

이한준 대학생기자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